김해 봉황동 유적
경상남도의 사적 | |
종목 | 사적 제2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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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보호구역: 211필지, 120,609m2[1] |
시대 | 청동기시대 |
위치 | |
주소 | 경남 김해시 봉황동 253번지 외 |
좌표 | 북위 35° 13′ 47″ 동경 128° 52′ 42″ / 북위 35.2297709° 동경 128.8784676° |
정보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해지) | |
종목 | 문화재자료 제87호 (1983년 12월 20일 지정) (2001년 2월 5일 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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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김해 봉황동 유적은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호 김해회현리패총으로 지정[2]되었으나, 2001년 2월 5일 김해패총(金海貝塚)과 금관가야의 집단 취락지인 봉황대(경남문화재자료 제87호)를 합쳐 김해봉황동유적으로 확대지정 및 명칭변경[3]되었다가, 이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김해 패총
[편집]1907년(융희 1년) 이마니시 류의 조사 이후 1934~1935년에 걸쳐 일본 학자가 매장지를 조사 발굴(발굴 당시에는 김해읍 회현리(會峴里))하여, 조개더미[4]와 같은 성격이 드러났다. 봉황대 언덕 근처에 서로 시기가 다른 회현리 조개더미와 다양한 무덤유적이 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붉은 토기(적색토기, 赤色土器) · 회색 토기·가야 토기의 파편과 철부(鐵斧)·철도자(鐵刀子, 쇠 손칼), 뼈·뿔도구, 가락바퀴(방추차), 불탄쌀(탄화미), 동물뼈 들이 있다. 사슴뿔이나 뼈를 가공해 만든 칼자루가 많다. 불탄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중국 신(新)나라의 왕망이 기원전 14년에 만든 화폐, 화천(貨泉) 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 이 유적이 형성된 연대가 철기 시대라는 것과 중국과의 왕래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고인돌·상식석관(箱式石棺) · 항아리에 뼈를 넣었던 독무덤(옹관, 甕棺)·세형동검(細形銅劍)·마제석촉(磨製石鏃) 등이 발굴되었다. 이 조개더미는 금석 병용기 말부터 삼국 고분기(三國古墳期)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무덤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각주
[편집]- ↑ 문화재청고시제2018-137호(김해 봉황동 유적 보호구역 추가 지정), 제19360호 / 관보(정호) / 발행일 : 2018. 10. 19. / 142 페이지 / 636KB
- ↑ 문교부고시 제173호, 《사적재지정목록》, 문교부장관, 대한민국 관보, 1963-01-21
- ↑ 문화재청고시제2001-2호(문화재〈사적〉지정,확대지정및명칭변경), 제14719호 / 관보(정호) / 발행일 : 2001. 2. 5. / 22 페이지 / 146.8KB,
확대지정 및 명칭변경사유 : 사적 제2호‘김해회현리패총’과 인접한‘봉황대유적(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지역을 발굴조사한 결과, 가야 초기부터 후기에 걸친 패총(貝塚)과 수혈주거지, 고상가옥등 구릉지역에서 주거유적이 발견되고, 경사면을 따라 회현리패총과 연결되는 패총(貝塚)유적이 광범위하게 나타나 취락의 방어시설과 함께 실제 생활에 사용했던 토기, 골각기, 철기등의 생활유물들이 다양하게 남아있는 금관가야 지역 최대의 종합생활유적으로 가야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임. 따라서 봉황동유적은 지배계층이 생활하였던 마을이었으며, 또한 패총(貝塚)은 동일시대 봉황동 유적의 일부임이 확인되어 사적을 확대지정하고, ‘김해회현리패총’을 현 행정지명에 따라‘김해봉황동유적’으로 명칭변경하는 것임. - ↑ 패총 또는 조개더미는 조개껍질과 생활 쓰레기가 함께 버려져 쌓여 있는 곳이므로 당시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장소이다.
참고 문헌
[편집]- 김해 봉황동 유적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